
기억을 잃는다는 게 꼭 비극일까요? 처음엔 당연히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영화 <첫 키스만 50번째>를 보고 나서 그 생각이 조금 흔들렸습니다. 매일 아침 어제를 지운 채 눈을 뜨는 루시, 그리고 그 루시를 위해 매일 새롭게 첫인사를 건네는 헨리. 단기 기억상실증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이렇게 따뜻하게 풀어낸 영화가 또 있을까 싶었습니다.
단기 기억상실증, 영화가 보여준 것과 실제 사이
영화 속 루시는 1년 전 교통사고로 뇌를 다친 뒤, 매일 아침 그날 이후의 기억이 초기화된 채 눈을 뜹니다. 의학적으로 이 상태는 선행성 기억상실증(Anterograde Amnesia)에 해당합니다. 여기서 선행성 기억상실증이란, 뇌 손상 이후 새로운 정보를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오늘 만난 사람을 내일 아침엔 완전히 낯선 사람으로 대하게 되는 것이죠.
이 장애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뇌 구조가 바로 해마(Hippocampus)입니다. 해마란 뇌의 측두엽 안쪽에 위치한 기관으로,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는 핵심 역할을 담당합니다. 제가 학창 시절에 유행했던 '해마 학습법'을 처음 접했을 때 이 구조 이름이 왜 거기 붙었는지 한참 궁금했는데, 결국 기억의 핵심 기관이라는 뜻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 학습법은 발음을 우스꽝스럽게 한글로 연결하거나 이야기로 이미지화해서 해마를 자극하고 장기 기억화를 유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출처: NIH (National Library of Medicine) — 해마와 기억 형성
영화에서 루시의 아버지와 오빠는 매일 아침을 1년 전 그날처럼 연출합니다. 같은 신문을 사다 두고, 썼던 생활용품을 다시 채우고, 봤던 풋볼 경기를 틀어놓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서 솔직히 처음엔 감동보다 피로감이 먼저 느껴졌습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매일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며 연기한다는 건, 사랑만으로 버티기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루시의 기억 손상에 대해 "치료가 어렵다"는 의견도 있지만, 영화는 뇌의 손상 부위가 조금씩 작아지면서 기억이 단편적으로 돌아오기 시작하는 가능성을 함께 보여줍니다. 실제로 신경 가소성(Neuroplasticity), 즉 뇌가 손상 이후 스스로 회로를 재구성하는 능력은 현대 뇌과학에서 활발히 연구되는 분야입니다. 출처: BrainFacts.org — 기억 형성과 저장 원리
- 선행성 기억상실증: 손상 이후 새로운 장기 기억 형성이 불가능한 상태
- 해마: 단기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전환하는 뇌 기관. 기억상실증과 직접 연관
- 신경 가소성: 뇌가 손상 후 스스로 회로를 재구성하는 능력으로, 루시의 부분 회복을 설명하는 근거
- 해마 학습법: 해마를 자극해 영어 단어를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는 연상 암기 방식
망각은 선물일까 — 기억을 둘러싼 두 가지 시선
"망각은 선물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한때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중학교 때 절 괴롭혔던 동창을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 당시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게 재앙처럼 느껴졌거든요. 차라리 잊고 사는 편이 낫겠다 싶었습니다. 반대로 여드름 투성이였던 사춘기 시절, 초등학교 때 좋아했던 남자아이를 우연히 마주쳤을 땐, 제 쪽이 그 기억을 잊어버렸으면 하는 게 아니라 그 친구가 저를 잊어줬으면 싶었습니다. 망각이 선물인지 아닌지는 결국 누구의 입장에서 보느냐에 달린 것 같습니다.
헨리는 루시를 처음 만난 날부터 이 딜레마와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식당에서 우연히 보게 된 루시, 와플을 집 모양으로 만들어 먹던 그 모습에 이끌려 다시 찾아갔다가 전혀 모르는 사람을 대하듯 차갑게 대응하는 루시를 보며 처음엔 당황합니다. 이후 단기 기억상실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헨리는 떠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결국 매일 새로운 방식으로 루시에게 다가갑니다.
이 부분에서 저는 루시보다 오히려 주변인들의 피로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연출, 매번 같은 질문에 같은 대답을 해야 하는 가족들. 아무리 사랑이 깊어도 저라면 어느 순간 지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솔직히 들었거든요. 그런데 영화는 그 피로감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헨리 역시 루시의 미래를 함께할 수 없다는 현실을 직면하고 알래스카행을 결심하는 장면에서, 이 이야기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는 걸 느꼈습니다.
흥미로운 건 루시의 무의식입니다. 기억을 저장하지 못하는 상태임에도 루시는 잠들기 전 그림을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헨리와 관련된 이미지를 반복해서 표현합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절차 기억(Procedural Memory)과 암묵 기억(Implicit Memory)의 잔존으로 설명합니다. 절차 기억이란 의식적인 회상 없이도 몸이나 감정이 익힌 것을 유지하는 기억 체계를 말합니다. 뇌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중요한 것을 붙잡고 있는 셈이죠. 공부할 때 내가 본 것을 사진처럼 저장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쩌면 뇌는 이미 자기 방식으로 중요한 것을 가려서 저장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헨리가 루시에게 건넨 비디오테이프는 그 점에서 특별합니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 혼란스러워하지 않도록, 자신이 누구인지와 왜 이 배 위에 있는지를 영상으로 설명해둔 것입니다. 기억이 없는 루시가 안심하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설계된 일종의 인지 보조 도구인 셈입니다. 이를 보완적 인지 전략(Compensatory Cognitive Strategy)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루시의 뇌가 하지 못하는 것을 외부의 기록이 대신하는 방식이죠.
자주 묻는 질문
Q. 첫 키스만 50번째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인가요?
A. 실화 기반은 아닙니다. 2004년에 제작된 픽션 로맨틱 코미디 영화입니다. 다만 영화에서 묘사된 선행성 기억상실증은 실제 존재하는 신경학적 상태이며, HM이라는 이니셜로 알려진 실제 환자 사례가 이 증상의 대표적인 연구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픽션이지만 의학적 근거가 전혀 없는 설정은 아니라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Q. 영화 속 바다코끼리 자쿠는 실제 훈련된 동물인가요?
A. 네, 맞습니다. 자쿠의 연기는 컴퓨터 그래픽 없이 실제 바다코끼리가 직접 소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동물 배우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만큼 극 중 존재감이 상당합니다. 저는 처음 이 정보를 접했을 때 꽤 놀랐는데, 영화를 다시 보니 그 장면들이 새롭게 보이더군요.
Q. 단기 기억상실증은 실제로 치료가 가능한가요?
A. 원인과 손상 부위에 따라 예후가 크게 다릅니다. 완전한 회복이 어렵다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신경 가소성 연구가 진전되면서 부분적인 기능 회복 가능성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영화처럼 극적인 회복을 기대하기는 어렵지만, 보완적 인지 전략이나 재활 치료가 실생활 적응을 돕는 데 유효하다는 연구 결과들은 존재합니다.
Q. 해마 학습법이 실제로 효과가 있나요?
A. 해마 학습법이 획기적이라고 보는 분들도 있는데, 저는 개인차가 상당히 크다고 생각합니다. 연상 이미지나 이야기를 만드는 방식이 해마를 자극해 장기 기억 전환을 돕는다는 원리 자체는 인지심리학적으로 근거가 있습니다. 다만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효과적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고, 개인의 인지 스타일에 따라 맞는 암기법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봅니다.
결론
정리하면, 첫 키스만 50번째는 단기 기억상실증이라는 신경학적 현실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무게를 하와이의 햇살처럼 풀어낸 영화입니다. 제가 이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가장 오래 남은 건 루시와 헨리의 키스 장면이 아니라, 매일 아침을 리셋하며 딸을 위해 무대를 다시 세우는 아버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루시가 자신도 모르게 그림으로, 노래로 헨리를 기억하려 했다는 것. 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걸 붙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망각에 대한 시선, 기억의 작동 방식, 그리고 사랑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고 싶다면 이 영화가 좋은 출발점이 될 것 같습니다. 드류 베리모어가 직접 아담 샌들러를 캐스팅 상대로 지목했다는 뒷이야기도 영화를 보고 나서 찾아보면 꽤 재미있습니다.